[투데이픽] 추억의 몰락, 헌책방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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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픽] 추억의 몰락, 헌책방의 위기
  • 길금희 기자
  • 승인 2019년 04월 20일 09시 1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4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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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책이 없어 못 팔 때도 있었죠…"

노끈으로 헌책뭉치를 단단히 엮어 매는 70대 주인의 손에서 헌책과 같은 세월의 연륜이 느껴진다.

80년대 '88서울 올림픽'으로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던 그 시기, 대전 동구 원동의 헌책방 거리도 올림픽 열기만큼이나 책을 사랑하는 청춘들이 가득 찼었다.

문학의 발전으로 시와 소설 등 다양한 소재의 문집들이 쏟아지던 그 때 신문물의 홍수 속 대학생을 비롯한 중·고교생과 성인들은 세대를 불문하고 이곳 헌책방 거리에 나와 그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를 읽고 느꼈다.

책 한권에 300원에서 1000원까지, 맘 놓고 새 책을 사서 보기 힘들던 학생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가격도 착했다. 그 시절 학생들에게 헌책방은 그야말로 성지였다.

'흙'과 '이방인' 등 국내소설을 비롯한 전 세계 명작 소설들이 저마다 싼 몸값을 들이밀며 들어오기 무섭게 청춘들의 품에 안겨 나갔다.

50년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 70대 책방주인은 "갖다 놓기 무섭게 팔려나갔으니까. 주말이면 책 찾으러 오는 손님들로 북적북적했지"라며 "그 무렵이 헌책방의 전성기"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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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헌책방이 즐비했던 원동 거리는 이제 단 5곳만의 책방이 남아 있다.

모두 20년이 넘게 이곳을 지키며 청춘시대를 풍미하던 대표 책방들이다.

그러나 1997년 어렵다던 IMF 위기까지 넘기며 전성기를 기다려온 책방주인들은 이제 그 시절 추억을 가슴에 담고 발걸음조차 뜸해진 거리를 묵묵히 지킨다.

화려했던 그때처럼은 아니어도 찾는 발길만이라도 끊이지 않기를 기대하지만, 이미 퇴색이 짙어져버린 헌책방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주인의 말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2000년대 들어 급격히 발달한 인터넷 문화에 온라인 도서구매가 급증했고, 경제수준이 높아지며 사람들은 더 이상 헌책을 사보지 않았다.

그나마 2010년 전후까지 전과나 백과사전 등 참고서를 찾는 학생들 덕에 근근이 가게를 이어나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헌책방 주인 B씨는 "90년대 한 달 100만원 넘던 매출이 이제는 반 토막도 못 채울 때가 태반"이라며 "월세 내고나면 겨우 용돈벌이지만 한 평생 열어온 가게를 닫을 수도 없지 않냐"고 말했다.

또 다른 주인도 "책값이 그렇게 올라도 헌책은 비싸봐야 2000원 남짓인데 찾는 사람이 없다"며 "매주 쌓인 책을 처치 못해 이번 주도 한 아름 고물상에 갖다 줬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실제 온라인상에 고가에 거래되는 보기 드문 고전소설 첫판도 이곳에선 단돈 몇 천원에 구할 수 있었지만 찾는 사람이 없다보니 소각상태에 놓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형 중고서점이 늘어나며 기업형 중고서점 시장이 크게 성장한 점도 영세 헌책방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대표적인 기업형 중고서점 알라딘의 2017년 당기 순이익은 102억원 대로 2010년 22억원과 비교하면 무서운 성장세다.

문학의 성행과 급진적 경제 발전, 그 후 찾아온 인터넷과 대기업 등의 경쟁자 출현을 마주하며 시대의 흐름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헌책방은 오늘도 켜켜이 쌓아 놓은 책들을 품고 우리를 기다린다.

길금희 기자 goldenlad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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