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속사연] 충공도(忠公道)와 공청도(公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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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속사연] 충공도(忠公道)와 공청도(公淸道)
  • 충청투데이
  • 승인 2019년 03월 05일 2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19년 03월 06일 수요일
  •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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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고려 이후 행정구역인 도(道)는 당시 인구가 제일 많은 목(牧:지방 행정단위)과 그다음의 목의 첫 글자를 따서 8개 지역으로 나뉘었다. 충청도는 지금의 충남북과 대전에서 당시 인구가 가장 많은 '충주'와 그다음 '청주’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충청도의 탄생은 고려 1106년(예종 1년) 때다. 이 충청도가 공청도 등으로 바뀐 일이 있었다. 삼강오륜(三綱五倫), 역모(逆謀)를 범한 죄인이 있으면 죄인의 지역 명을 빼고 인구가 그다음인 지역 명으로 일정 기간 동안 교체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에 얻어걸린 도 가운데 충청도가 가장 많았다.

충청도는 가장 먼저 '충공도'로 바뀌었다. 1505년(연산군 11년) 연산군은 규간(規諫:그릇된 일을 고치도록 말함)하는 환관 김처선(金處善:고향 全義,지금의 세종시)을 활을 당겨 죽였다. 분을 이기지 못한 연산군은 그의 양자인 환관 이공신(李公信)도 죽였다. 이공신의 고향이 '청주'였다. 당연히 청주목은 강등됐다. '청주'가 빠지고 그 자리를 인구가 청주 다음으로 많은 '공주(公州)'가 대신해 '충공도'가 된 것이다. 1539년 (중종 35년) 충주목에서 세곡(稅穀)과 환곡(還穀)을 몰래 빼돌려 팔아먹은 자들이 붙잡혀 처형됐다. 중종반정으로 되찾은 '충청도'는 곧바로 '충주목'이 '예성군'으로 강등되면서 박탈됐다. 대신 '공주'가 들어와 '청공도'로 바뀌었다. 충청도는 1735년 (영조 11년) 때 더욱 비참한 처지가 됐다. '이인좌의 난(소론이 주도한 반란)'에 연루된 소론들의 출신인 청주와 충주, 나주, 원주가 모조리 '목'에서 '현(縣)'으로 강등되면서 충청도 명칭에서 '청주'와 '충주'가 모두 빠져 버렸다. 역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공주'와 네 번째인 '홍주(洪州:지금의 홍성)'을 넣어 '공홍도(公洪道)'로 변경됐다.

충청도는 366년 동안 20차례 명칭의 박탈과 회복을 거듭했다. 1862년 (철종 13년) '공충도'에서 1871년 (고종 8년) '충청도'로 환원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