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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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비지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4월 16일 19시 0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4월 17일 금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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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입맛이 없는 날은 산성으로 향하곤 하였다. 사람들은 성곽 주변을 산책하러 가는 줄 알지만, 행선지는 그리움을 파는 식당이다. 건조한 입맛을 돋우고자 나선 길이다. 강바람이 부는 날은 더욱 궁금한 음식이다. 뚝배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팔팔 끓는 찌개의 국물이 뚝배기의 허리를 타고 흐르는 장면이 눈앞에 삼삼하다. 식당은 장날의 시장 분위기처럼 손님들이 북적거려야 음식의 제맛이 난다.

나이가 들어도 입맛이 변하지 않는 향수가 어린 음식이다. 돌아보면, 비지는 변함없이 나의 입맛을 챙긴 것 같다. 워드에 '비지'란 문자를 치며 내심 찔린다. 입맛은 비지가 당겨 외출을 서두르나 입말은 청국장을 먹으러 간다고 말한다.

비지를 선호하며 주저하는 건 모순이다. 몸의 감각이 동하여 손이 먼저 그곳을 향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자신의 감각을 인정하지 않는 꼴이다. 콩알이 오글오글한 청국장처럼 대우받지 못하는 형국이다.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가. 아니면, '찌꺼기'란 인식의 꼬리표를 떼지 못한 탓일까. 유독 단어에 신경이 쓰인다. 비지가 인간의 내면과 다른 겉모습에 치중한 삶처럼 취급하는 것 같아 슬프다.

사전에도 비지를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라고 기록된다. 두부의 부산물로 조리하면, 영양가 좋은 음식이라고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비지란 단어를 두루 살피니 음은 같고 뜻이 다양하다. 그중에 '자기가 사는 곳을 보잘것없는 곳'이라고 낮춰 말하는 비지(鄙地)는 겸손의 미덕을 지녔다. 요즘 대세가 자기 자랑 시대가 아닌가. 그리 보면, 영양가 많은 비지도 비지(鄙地)처럼 자신을 낮춰 '찌꺼기'로 불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

비지처럼 조화를 잘 이루는 음식도 없으리라. 깔끔한 맛을 원하는 사람은 순수하게 비지만 넣어 끓이고, 짭조름한 맛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은 푹 삶은 우거지나 신김치를 송송 썰어 넣어 끓인다. 더불어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다져 넣으면 씹히는 맛이 있어 좋다. 섬유질과 영양소에도 나무랄 데가 없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펄펄 끓는 비지찌개가 눈앞에 놓이면 절로 군침이 돌리라. 비지찌개를 맨입에 떠먹거나, 흰밥에 올려 비벼 먹는다. 입안에서 맛을 느낀 순간, 삶의 고통과 설움이 절로 시르죽는다. 나는 어느 절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생기를 얻는다.

비지는 오래전부터 즐겨한 서민들의 음식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을 다독이는 조력자이다. 오죽하면, 오늘 흘린 비지땀이 내일의 큰 성과를 부른다고 하겠는가. 또한, 비지는 세상과 조화를 이뤄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하는 성싶다. 아쉽게도 그리움을 파는 상점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문명의 그릇에 욕심이 담기면, 고유의 맛을 잃기 마련이다. 입맛 좋은 식당을 찾는 것도 좋지만, 친정어머니의 손맛을 직접 흉내를 내고 싶다. 기억의 화첩을 들추니 내 의식은 이미 어머니의 부엌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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