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바람의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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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바람의 제물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9월 03일 19시 41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04일 금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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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 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내가 머무는 곳은 바람골이다. 강도 높은 바람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람이 회오리처럼 휘돌아 집을 에워싸는 듯해 겁이 난다. 무더위가 여러 날 지속되더니 태풍을 부른 것인가. 태풍은 고온에서 일어난단다. 그렇다고 기상에 관하여 깊이 알고 싶지 않다. 다만, 바람의 제물이 될 나의 소중한 식물들을 단단히 단속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집에 머물며 겪은 산 경험으로 바람을 맞을 채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나무에게 나뭇잎은 소중하다. 봄날의 햇살에 일렁이는 신록과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이파리의 몸짓은 눈부실 정도다. 바람의 몸짓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늘이 노한 것처럼 번개와 강한 태풍을 몰고 오면, 나무는 단호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험한 날씨를 견뎌내고자 작은 제물로 자신의 일부분을 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풍은 가혹하게 나무둥치를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지난해 태풍 링링이 하늘정원에 남긴 처참한 광경이 떠오른다.

새벽에 참혹한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수십 그루의 해바라기의 꽃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동백꽃이 스러지듯 꽃의 목이 잘려 바닥에 잔해로 뒹군다. 어찌 그뿐인가. 바닥에 푸른 잎과 줄기가 너저분하다. 너무나 가혹한 처사이다. 꽃들이 한창 보기 좋은 시기에 아수라장을 만들어 실망감을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동백꽃은 나무 발치에 꽃을 떨어트리기라도 하지, 해바라기 꽃은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서너 개만 눈에 들어온다. 간밤의 바람 소리에 이 광경을 예감했어야 했던가.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한동안 정원에 나가기가 꺼려졌다.

해바라기는 여름내 불볕을 먹고 자란다. 무더위 속에서도 불평 없이 키를 키우고 꽃을 피운다. 꽃대가 멀대 같이 큰 것이 꼭 나를 닮은 것 같아 해마다 씨앗을 뿌린다. 해를 바라기 하는 순수와 노랗게 활짝 핀 꽃의 표정이 밝아서다. 정원을 꾸린 장소가 24층 옥상 층이다. 하늘이 가까워 그런지 새벽과 저녁 무렵에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들이 견디지를 못한다. 여름휴가도 식물들 걱정에 멀리 가지 못하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정도이다. 이렇듯 애지중지한 꽃과 나무가 싹쓸바람에 상처 입고 흩어지니 그 상심을 어찌 말로 다하랴.

해바라기가 바람의 제물로 바친 것이 꽃이라니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 태풍 앞에선 어쩌지 못하리라. 꽃송이는 해바라기의 목숨이다. 자신의 온몸을 바쳐 사수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뒤늦게 돌아본다. 그맘때쯤 피었던 더덕꽃과 나팔꽃, 수국과 백일홍, 푸른 잎만 무성한 국화 등속이다. 그들은 버젓이 생을 유지해가니 해바라기가 제물이 된 덕분인가.

세상에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 많다. 오죽하면 우리네 삶이 빚진 인생이란 말이 나올까. 우주 만물은 음양으로 제물로 내놓은 것들이 상당하리라. 창밖에 소슬바람이 분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대가 없이 얻어지는 건 없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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