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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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울타리'
  • 충청투데이
  • 승인 2020년 09월 10일 19시 30분
  •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11일 금요일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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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옥 수필가

가을이다.

“입추도 지났고 처서도 넘겼으니 계절로는 분명 가을이다. 허나 질기고 지루했던 장마가 끝나니 여름내 참았던 봇물을 쏟아 놓는 듯 늦더위가 집요하다”라는 글씨가 곱게 쓰인 하얀 모시 천이 맏딸 집 벽에 걸렸다.

도화지를 오려 곱게 색칠한 6살 손자의 하트 선물과 함께 장미꽃 61송이를 품에 안으며 떡 벌어진 상차림 앞에 앉아 환갑주(還甲主)가 된 것이다.

출가했어도 하루가 멀다 하며 친정집에 모여 어미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일이 허다하던 세 딸이 오롯한 솜씨로 생일상을 차린 걸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아직 살림에는 덜 여문 솜씨거니 하여 김치며 밑반찬을 때 맞춰 챙겨 들려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런 일은 어미의 당연한 할 일이라 여태 생각했었다.

오밀조밀 구색을 맞추고 예쁜 장식까지 곁들인 요리들이 내가 늘 해주던 음식들과는 생판 다르게 오감을 자극했다. 남의 손 안 빌리고 저희끼리 그득하게 차린 걸 보니 염려 속에서도 어느새 어엿한 살림꾼으로 여물어갔나 보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영원한 울타리라 생각했다. 둥지를 떠나 울타리 밖으로 이탈하면 험한 세상에서 털끝 하나라도 탈 날까 늘 노심초사하며 자식들을 품 안에서 보듬으려 했다. 그래서였을까. 성인이 되고 짝을 찾아 새로운 둥지를 틀었어도 여태 모정이란 밧줄에 매어 내 안의 울타리 안에 닻을 내리고 염려와 걱정을 끼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천지의 바스락하는 바람소리에도 행여 흔들릴까 매사 조심스러웠고 여리디 여린 손 매무새로 살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걱정과 관심을 풀어내지 못하고 노심초사했다. 그 옛날 친정어머니가 내게 그러하셨듯이 내 자식들에게 어미는 단단한 울타리가 돼야함이 마땅하고 그 안에서 안락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길 소원했다.

환갑을 맞은 어미를 안온의 중심에 놓고 빙 둘러앉아 건강과 평온을 기원하는 덕담으로 효심을 전하는 마음들이 그간 어미의 소견은 한낱 기우였음을 알게 했다.

밤하늘에 은하수가 푸르게 여울져 흐르고 있다.

고개를 들어 은하수가 입안으로 쏙 들어올 때쯤이면 내 생일이라 시던 엄마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난다. 이맘때 여름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엄마 무릎에 누워 은하수와 입을 맞춰보며 생일을 손꼽아 기다렸었지. 여나 무살의 기억이 하늘의 별처럼 아직도 추억으로 총총히 남아있는데 60여년의 무상한 시간이 어느새 찰나로 흘렀음을 돌아보니 가슴 한편이 뻐근해져 온다.

이제 분명 가을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 분명 내 울타리 안에 드리워졌으니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며 또다시 추억을 만들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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