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이윤종 산림조합중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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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이윤종 산림조합중앙회 회장
  • 선태규 기자
  • 승인 2003년 08월 19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3년 08월 19일 화요일
  •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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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사랑 30년… 푸른숲 지킴이

"고향의 국갇민족의식이 점점 퇴색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산림조합중앙회 이윤종 회장이 출생한 충북 영동지역은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히 항거했던 장소 중 하나로 동아일보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 회장은 이 지역 지주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골마을의 또래들은 물론이고 소작인들도 존대를 할 뿐 아니라 소작인의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집안에서 싫어했어. 그래서 그런지 '차별화에 대한 거부의식'을 항상 느끼고 있었던 거 같아."


이 회장은 당시를 이처럼 회고했다. 그래서 대전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해방감을 맛보았다고 했다. 중3 때는 6·25 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한 채 대구로 피란을 가기도 했다.

"피란 생활을 마치고 복학했는데, 미군들이 학교 교실을 점거한 거야. 보문산 기슭에서 챙 넓은 밀짚모자를 뒤집어 쓰고 수업을 받았지."

이 회장은 "초등학교 입학 때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고, 5학년 때 일제시대로부터 해방을 맛보았기에 전쟁과 혼란 속에서 학교를 다닌 셈이지"라고 말한 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금 대전 판암동인가, 가양동 근처에 삼방사라는 일본인 군수공장이 있어. 전쟁이 끝나니까 공장이 텅 빈 거지. 거기서 다시 수업을 받게 됐어."

당시 대전중학교 앞에 십단본부라는 일본인 군부대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가 그 다음 이 회장의 교실이었다. 그 후 미군들이 학교에 화재를 일으켜 기숙사 건물(현 언덕쪽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유실됐다. 결국 기숙사 옆에 건물을 증축해 교실을 옮겨 겼고, 미군들과 함께 학교를 공유하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전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2 때쯤인갉 집에 갔는데, 마침 20∼30여명의 일꾼들이 타작을 마치고, 새참을 먹으며 쉬고 있었어. 당시 닭 100여마리를 방사해서 키웠는데, 이 놈들이 벼 이삭이라도 주워먹으려고 타작터로 모여든 거야.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솔개 한 마리가 달려든 거지. 바로 이때 장닭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뽑더니 날개를 쭉 펴며 '경계'를 알리는 소리를 질러댔어. 내가 광경을 목격했던 그 순간 은 솔개가 그 장닭의 길게 뻗은 목을 날개로 예리하게 쳐낸 후 쓰러진 장닭을 움켜쥐고 달아나려는 찰나에 였지.내가 솔개를 쫓아버렸지."

이 회장은 솔개를 쫓아 버렸고, 목뼈가 부러진 듯한 그 닭은 다시 원기를 회복했다.

"아버지가 부르면 으레 맞거나 혼나는 걸로 생각해 엄청 무서워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가 바로 날 부르더라구. 속으로 조마조마했지. 또 무슨 일로 혼날 것인갉."

이날 따라 아버지는 이 회장을 대청마루에 앉으라고 하더니 '이 회장에 따르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사람이 저 장닭 정도의 처신만 해도 조상이나 후손이 욕을 안먹는 거야. 저 미물도 동족을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았느냐. 공부도 중요하지만 이런 사실을 명심하고 평생을 살거라."

당시 이 회장은 어린 나이에 "당연한 것인데, 괜히 그런다"는 식으로 받아들였으나, 그후 일생을 살아오면서 이 말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 회장이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 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가져온 '타인과의 차별의식에 대한 거부감'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회장은 국제농련이라는 단체를 통해 일본에 1주일간 견학을 갔다.

"하루는 일본 나가노 지방의 협동조합을 구경갔고, 60대로 보이는 조합장으로부터 환영회 겸 저녁식사 대접을 받았어. 그런데 이 조합장이 대뜸 '나이지(內地)'에 언제 왔냐고 묻지 않겠어."

나이지(內地)는 조선을 일본의 식민속국으로 보고, 본토에 언제 왔느냐고 얕잡아 보는 의미. 이 회장이 못 알아들은 척하자 이 조합장은 정색을 하더니 "당신 조선사람 아니오. 우리 본토에 언제 왔느냐고"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이 회장은 "이런 치욕적인 자리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 없소"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찾은 곳이 어느 여관. 분을 참지 못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없어 홑이불을 뒤집어 쓰고 분을 삭이며 내일의 성공을 다짐하기도 하였다고 이 회장은 회고했다.

이 회장은 그러나 일본 농민들의 지혜로운 점도 많이 느꼈고, 특히 "무조건 정부 방침에 반대하던 자신의 성향을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유산으로 산을 물려받아 돌보면서부터. 30여년간의 조림인생을 걸어온 이 회장은 예전의 엄하던 아버지처럼 직원들을 대하고 있었다.

"모든 직원들이 아마 다 나를 싫어할 거야. 자상하지가 못하거든."

그러나 이 회장은 "직원들은 자식 같고, 나이 많은 간부들은 동생 같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지"라며 지난날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현재 모습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약력

1934년 2월 20일, 충북 영동 출생

[학력]54년 대전고 졸, 59년 동국대 법학과 졸, 66년 일본 국제농업청년연맹 연수과정 수료, 91년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 자연자원정책과정 수료

[경력]1963∼66년 영동군 농촌자원지도자연합회장, 1964∼66년 영동문화원 부원장, 1974년 영동군 산림조합장, 1980∼88년 산림조합중앙회 임산사업소장, 1988년 산림조합중앙회 상임감사, 1994년 대통령직속 농어촌발전위원회 위원, 1994∼2000년 임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 1995년 임업단체총연합회 회장(현), 1995년 민주평통 자문위원, 1995∼97년 농업정책심의회 위원, 1998∼2003년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 2002년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 위원(현), 2003년 산림조합중앙회 회장(현)

[상벌]동탑산업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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