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이종은 (당진출신·상록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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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이종은 (당진출신·상록회 회장)
  • 선태규 기자
  • 승인 2003년 12월 15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3년 12월 15일 월요일
  • 2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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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정의편에 선 마지막 野人
▲ 이종은 (당진출신·상록회 회장)

"김두한이 해머면 내 주먹은 마치(망치)야. 그래서 내 별명이 한때 '대갈마치'였지."

한때 이정재, 김두한, 이화룡 등과 구역을 나눠 무교동부터 을지로 4가 일대를 관할했던 '어깨 두목' 이종은 상록회 회장(당진 출신 원로 단체장 모임). 그의 주먹은 크지 않았으나 급소에 정확히 꽂혔기 때문에 자신보다 큰 상대도 쉽게 제압했다.
이 회장은 "당시 동대문, 종로 4·5가는 이정재가, 종로 1∼3가까지는 김두한이, 명동은 이화룡이, 남대문은 평양꼬마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무교동부터 을지로 4가까지는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어 내가 슬그머니 터를 잡았어. 그리고 하나하나 덤비는 놈들을 때려눕히다 보니까 이름이 알려지게 됐어"라고 했다.

한때 120여명이 그의 휘하에서 움직였고, 7년여 동안 무관의 제왕으로 밤거리를 주름잡았다.

이 회장을 여의도 모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작은 체구에 좀 왜소해 보였고, 나이도 들어 보였다. 본인 말로 '내년이 7땡(77세)'이라고 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그를 여의도에서 만난 것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 장로이기 때문이다.

당진군 읍내리 출신의 이 회장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긴 뒤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 왔어. 그걸 글로 쓰면 최소한 상·중·하 분량의 장편소설은 될 것 같아"라며 감회에 젖었다.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일본 아이들을 싫어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검도를 했던 이 회장은 일본 아이들 하고 대련을 하면 반드시 이겼다. 이 회장에 따르면 검도의 기본 룰을 무시한 채 일본 아이들을 아무 곳이나 마구 때려 상대를 제압했다.

일본인이었던 당시 담임 선생은 이런 그를 자신의 집에 데려간 뒤 단팥죽 한 컵과 찹쌀떡 한 개를 주면서 "넌 공부도 검도도 잘하니까 그 길로 그대로 가면 성공한다"고 칭찬해 준 뒤 "한 번 때린 애는 또 때리지 말라"고 충고해 줬다. 이 회장의 마음속에 있던 '강한 민족정신'을 인정해 준 것이다.

이 회장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김좌진 장군,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오성과 한음이 가등청정을 물리친 얘기 등을 들으면서 자란 것이 이런 생활태도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이 회장은 함경에서 제주까지 전국의 수재가 모인다는 '청주 사범'에 지원했으나 당시 태평양 전쟁 발발시점이어선지 일본 선생들은 장애물 넘기, 수류탄 던지기 등의 체력 테스트만 했고, 결국 덩치 좋은 재수·삼수 선배들에 밀려 떨어졌다.

그 후 2년 동안 독학을 하면서, 일본인들의 공출작업에 투입, 마초(말먹이 풀), 칡넝쿨, 아카시아 껍질, 솔가지 기름 등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당시 큰형과 둘째형이 징용됐으나, 둘째형은 5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태이다.

이 회장은 당진중학교가 생기면서 독학생활을 접었다. 학교에 생긴 학도호국단에 참여, 감찰부장을 하기도 했던 이 회장은 피난민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이 토착주민들을 괴롭히자 그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맨날 그 사람들 하고 싸웠고, 나랑 붙으면 다 나가떨어졌지. 싸움질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아마 막차기 3단은 될 거야"라고 이 회장은 말했다.
2년6개월의 군생활을 마친 뒤 소위 조직폭력배 생활이 시작됐다. 이때가 바로 '상이군인 공포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였고, 이 회장은 이들과 싸워 상인들을 지켜냈다.

상이군인들은 전쟁에 나가 다쳤다는 명분으로 국가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이를 핑계 삼아 상인들에게 돈을 요구하고, 거절하면 마구 때렸으며 심지어 잘린 손에 갈고리를 달아 마구 휘두르기도 했다. 수천명에 달하는 이들이 몰려온다는 소식만 들리면 그날 모든 상인들이 상점문을 닫고, 피신했을 정도로 이들의 악명은 대단했다.

이 시절 이 회장에게 '오줌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맞았던 상이군인'이 바로 고 이천성 목사다. 고 이 목사와는 한 부흥회에서 10여년이 지난 뒤에야 재회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갔는데, 설교를 반말로 하고 좀 건방지더라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세히 설교자를 보니 내가 팼던 그 친구야. 처음에는 못 알아보더라구. 그래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지."

이 회장이 한참 동안 이렇게 말을 해 준 뒤에야 평양 출신인 이 목사는 "어, 맞아, 그치야, 그치라니까"라며 절뚝거리면서 다가와 이 회장을 얼싸안고는 "우리 하나님 멋있다. 깡패 이천성을 목사 만들고, 깡패 이종은을 장로로 만들어 만나게 해 주시다니"라며 오열을 터뜨렸다.

김두한이 이 회장을 찾아온 적도 있었다.

"여기 이종은 동지라고 있나."

김두한의 첫 마디였다. 김두한에게 자신을 소개하자 악수를 하겠다며 자신의 손을 움켜잡는데, 그 손이 보통 사람 4명 정도의 손을 합한 두께로 마치 솥뚜껑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 회장은 말했다.

김두한으로부터 자신을 찾아온 자초지종을 들은 이 회장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미군부대의 폐자재를 받아 다시 파는 일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물론 이 회장도 대학을 다녔다. 지금은 고려대에 흡수된 당시 '국학대학'에 진학, 국문학을 전공하며 피난 전까지 1년 동안 다닌 것이다. 이 회장은 "양주동, 이희승 박사님이 나를 꽤 사랑했어. 양 박사님은 내게 고시조를 많이 외울수록 인생에 도움이 된다며 권유하셨어 당시 고시조 100수 정도는 암기했지"라고 말한 뒤 즉석에서 2개의 시를 적어 보였다. 이 회장의 먼 친척이기도 한 이희승 박사는 '예의 범절'과 '언행 심사'를 엄격하게 가르쳤다.
조직폭력배 생활을 접은 뒤 건설업계에 발을 디딘 이 회장은 대산건설 사장과 동원전척 회장으로 있다가 은퇴를 했다.

'매사가 분명하자'는 좌우명을 품고 있는 이 회장은 '약자에겐 한없이 약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강한 삶'을 살아왔으며, 주변으로부터 '정의로운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삶이었으나 행복했고, 지금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이 회장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말을 맺었다. 

<약 력> ▲전 공성기업㈜ 사장 ▲전 대산건설㈜ 사장 ▲전 동원전척㈜ 회장 ▲여의도 순복음교회 원로 장로 ▲재경당진군민 상록회장 ▲(사)한국환경운동본부 명예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