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이종옥 (천안 출신·前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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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이종옥 (천안 출신·前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 선태규 기자
  • 승인 2004년 02월 23일 00시 00분
  • 지면게재일 2004년 02월 23일 월요일
  •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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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위하는 것이 진정한 군인정신"
"진정한 군인이 군대의 리더가 되어야 해. 고구려 때 연개소문, 양만춘, 을지문덕,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을 제외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군대가 백성을 위해 싸워서 이긴 전례가 없잖아.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양성하고, 통솔할 진정한 군인이 전 군의 총책임자가 돼야 해."

▲ 이종옥 (천안 출신·前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38년2개월의 군생활 끝에 2002년 4월 10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겸 지상구성군 사령관(계급 대장)으로 전역한 천안 출신의 이종옥 예비역 장군은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진정한 군인이 전 군의 리더로 성장하고 세워질 수 있는 풍토의 조성을 역설했다.

이 전 장군은 1944년 천안시 천원군 환성면 안서리에서 태어났다. 이 전 장군이 천안초등학교 1학년 때는 6·25 전쟁으로 교사가 파괴돼 국군 야공단이 교실을 신축해 주기도 했다.
군인들은 공사를 하는 기간 동안 주민들이 걷어준 음식과 김장김치, 인정을 함께 맛보았다.

이 장군이 이 때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던 길은 구불구불한 6㎞ 정도의 시골길이었다. 통학길 중에 내를 건너는 코스가 있는데,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금방 물이 불어나 건널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와 형이 맞은편까지 와서 "거기 가만히 있어"라며 주의를 준 뒤 밤 12시나 새벽 1시까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형이 이 장군을 들쳐 업고 집에 오곤 했다.

이 전 장군이 진학한 천안중학교는 전체가 공동묘지였고, 그 중 일부를 헐어서 운동장과 건물을 지은 곳이었다. 집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이 전 장군은 늘 후문으로 통학을 했는데, 학교에서 후문까지 오면서 수많은 공동묘지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낮에는 그래도 괜찮은데 밤에는 정말 겁이 나더라구."

이 전 장군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공부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담임 선생님이었던 민병달(전 천안시 교육감) 선생님과 둘째 형이 있다.

우선 이 전 장군과 10살 터울인 둘째 형은 이 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1학년 겨울방학 때 시골에 묻혀 살던 이 전 장군을 서울에 데려와 새롭게 펼쳐진 세상과 서울 유수의 명문고를 구경시켜 준 뒤 "서울에 있는 4대 명문고(서울고, 경기고, 경복고, 용산고) 중 하나의 학교에 진학하면 내가 학교를 다니게  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 전 장군은 둘째 형을 '꿈을 만들어준 분'으로 기억했다.

민 선생님은 이 전 장군의 담임이었지만,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교실에 남아, 홀로 공부에 매진했던 분이다. 이 전 장군은 공부 잘하는 친구 몇 명과 함께 선생님 곁에서 공부를 했다.  저녁 7시 정도면 선생님과 이 장군은 집으로 향하는데, 유독 이 장군만 공동묘지를 지나쳐야 하는 후문으로 퇴교를 했다.

"밤에 묘지 사이를 다니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6㎞를 걸어서 집에 갈 때에도 책을 읽으면서 갔어. 중학교 때는 공부 잘한다고 이름을 날렸지."
참고서를 선생님이 가르치기 전에 외워 버리고, 영어책도 미리 암기했던 이 전 장군은 그후 수십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 용산고에 진학했다. 당시 용산고는 480명이 정원이었고, 420명은 용산중학교 학생이 채웠고, 나머지 60명만이 시골이나 타 학교 출신자이었다. 그 학교에서 이 전 장군의 초기 성적은 실망스럽게도 '중간 이하'였다. 그리고 '촌놈' 소리까지 듣는 괄시도 받아야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태권도 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수련했고, 일부러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어. 군인이 나와 맞지 않을까 해서 군인의 길을 택했지만, 군인의식은 그 때부터 싹튼 것 같아"

한상준이라는 이 전 장군의 둘도 없는 친구를 이 시절에 만났다. 한씨는 당시 입학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을 한번도 놓치지 않던 친구였고, 토요일과 일요일 날에는 '빤스'만 입고, 둘이 교실에 남아 낮과 밤을 넘나들며 공부를 했다. 이 전 장군의 표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친구는 서울대 공대에 진학했고, 이 전 장군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서울대와 육사의 수준은 비슷했고, 용산고는 당시 한 학년에 120명 정도를 서울대에 입학시켰다.

"2월 1∼28일까지 기초 군사훈련을 했었는데, 그 때부터 눈이 싫어졌어. 육사 4년간의 생활은 한마디로 '용광로'에 비유할 수 있어. 힘들고, 그러면서도 끊임없는 인내를 요구하지. 공부와 체력단련을 열심히 해야 하고, 엄격한 규정 하에 생활을 해 나가야 해."

이 때 이 장군은 국내와 세계 문학전집을 거의 섭렵했다. 'preparedness is the key to succeed for victory'이라는 구절은 이 당시 맥아더 장군의 전기를 읽으면서 각인된 구절이다.

육사를 졸업한 했을 때, 후, 이 장군은 공인 4단이었고, 이 전 장군은 최 전방의 사단 특공 소대장으로 발탁돼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는 '실미도'라는 영화의 배경이 됐던 김신조 외 무장공비 일당이 남침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해였다. 전방에서는 북한군과의 접전이 빈발하고, 근무서던 아군을 납치하거나 초소를 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간첩을 잡으면 헬기를 타고 휴가를 떠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내가 지휘하던 부대가 이 때 2번에 걸쳐 10명의 간첩을 잡았어. 부대원의 반 이상이 헬기를 탔고, 나 역시 특공 소대장으로 서울까지 나와 국영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지."

이 장군은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남긴 수차례의 전공에도 불구, 단 한명의 부대원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던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 했다.

소령이 연대 참모를 맡던 시절에 이 장군은 대위이면서도 인사 주임으로 활동했다. 그 당시 전방에서는 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리거나 죽는 등 안전사고가 비일비재했고, 이 장군은 중부 전선의 수많은 험산준령을 손수 오르내리며, 안전교육을 실시했다. 그럼에도 휴가에 앞서 병사들이 더덕을 캔다거나 꿩을 잡는다는 욕심으로 지뢰밭에 들어가는 등 사고는 여전히 줄지 않아 몸과 마음이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이 장군은 회고했다.

소위 임관 후 34년2개월을 군에 몸담은 이 전 장군은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를 위해 어떠한 저해요소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기본 원칙을 전제로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군생활을 해 왔다고 자부했다.

이 장군은 특히 "5000여년의 역사 중에 백성을 위해 군인이 싸워서 지키고 이긴 적이 얼마나 되느냐. 군을 이용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군을 통솔하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느냐"면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강한 군대가 만들어져야 하고, 이런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진정한 군인이 군대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야 한다"며 "군대에서 이런 군인을 키우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향'이라는 물음에 이 전 장군은 고향 전경을 항공사진으로 찍어 책상 앞에 걸어 놓고 보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향에 대해 '나의 뿌리가 뻗어 있는 곳'이며, '정신적인 얼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표현도 썼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이종옥 전 부사령관은…

▲1944년 천안 출생 ▲용산고 졸 ▲1968년 육군사관학교 졸(24기) ▲특전사 인사처장 ▲3군단 참모장 ▲한미연합사령부 기획차장 ▲30기계화보병사단장 ▲7군단장 ▲1998년 국방정보본부장 겸 정보참모본부장 ▲2000∼2002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대장)